초보 자영업자로서 첫 발을 떼고 이제 오픈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식자재들도 넉넉하게 준비하였고, 조리도 실전처럼 여러 번 시뮬레이션 해 보았습니다. 동선들을 고려하여 포장용기들, 주방 집기들도 모두 정위치에 있군요. 내일은 상가에 입점해 있는 점포들을 다니면서 개업 기념품과 떡을 돌릴 예정입니다. 개업인사를 하는 셈입니다. 개업 기념품은 생선 모양이 들어간 나무 냄비 받침입니다.
그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요, 퇴사를 11월 말에 하였고, 어느새 4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사실 식당을 창업할 점포를 처음 알아보았던 날이 작년 8월이었으니, 거의 7-8개월여를 준비한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을 쇠고 나서 점포의 임대차 계약을 한 다음에는 급하게 계획하고 닥치는 대로 실행하느라 정신도 없었지만, 나름 가게의 주방과 홀을 둘러보니 뿌듯합니다.
조직을 떠나서 안정을 버리고, 이렇게 다소 엉뚱한 시작을 하게 된 것에 많은 사람들이 별별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제 자신이 현재로서 즐겁고, 심리적으로 편안하다면 그것 만으로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아직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엄청나게 실망하실 수도 있고, 큰 염려를 끼쳐드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 사소한 변화라도 생기면 늘 걱정부터 앞서는 분들이시니까요. 사실 어떤 반응이실지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말씀을 하실지도요.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자리를 잡으고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요즘은 잠자리에 누우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그러다보니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식당을 창업하게 된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는 운명론자는 아닙니다만, 학교를 다니고, 학위를 받고, 몇 군데의 회사를 다니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들이 결국 이렇게 식당을 창업하게끔 만든 것인가, 돌이켜보니 숙명적으로 식당을 창업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정해진 일이었는가 하는 다소 황당한 생각 말입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002년작 싸인(Signs)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인데요, 기복이 있는 편이라 대중이나 평단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지만, 언브레이커블이나 빌리지처럼 제가 평소 하던 공상이나 제가 가지고 있던 판타지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적이 많기 때문에 뭔가 정신세계가 저와 비슷한 맥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신작이 나오면 늘 바로 챙겨봅니다.
※ 아래 내용 중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싸인은 장르가 SF스릴러로 구분되어 있지만, 단순하게 미스터리 서클이나 외계 생명체와 충돌이나 대립을 다루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영화는 아닙니다.
멜 깁슨이 연기한 그레이험은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나서 신앙을 잃은 신부입니다. 그레이험은 어느날 자신의 옥수수 농장에서 거대한 미스터리 서클을 발견하게 되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게 되는데요, 결국에 결말이 어떻게 될지를 알려주는 싸인들(신호들, 상징들)이 영화 내내 이어집니다. 영화의 제목이 왜 싸인인지를 계속 알려주는데, 굉장히 정교하게 짜여진 암시들입니다.
왜 그레이험이 사제복을 벗게 되었는지,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동생 메릴은 왜 야구를 그만두었는지, 딸이 왜 물맛이 이상하다며 집안 여기 저기 유리잔들을 두고 다니는지, 이 모든 것들이 영화가 끝내 어디로 당도할지 알려주는 싸인들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일들이 필연적으로 작동하여 외계인을 물리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이 천식으로 인해서 독가스를 흡입하지 않게 되어 살아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경험한 그레이험은 다시 신앙을 찾게 되고요.
저는 이 영화의 결론 자체를 따를 필요는 없고, 샤말란 감독의 질문 그 자체가 이 영화의 메세지가 아닐는지 생각합니다. 모든 일이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가? 모든 일들은 그저 예정된 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하는 샤말란의 물음말이죠.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가 깊게 생각해고 결론을 내리면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라면, 그저 예정된 일일 뿐이라면 참 허망하기도 합니다. 지금 나의 노력들도, 자유의지도 무슨 소용일까요. 물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라이프니쯔는 신이 질서정연하지 않은 것을 발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로 우연을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는 모릅니다. 각자의 몫입니다.
지난 번 다른 포스팅에서 영화 가타카를 소개하면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운명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없다고 하였듯이, 제 삶은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 채워진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내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며, 제 삶은 제 손에 달렸습니다. 이 식당의 운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누구도 아닌 제 손에 달렸습니다.
당장 개업을 하는 이틀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두근거림을 안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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